2월의 어느 우중충한 화요일 오후 런던정경대학의 한 연구실, 마침 근처의 펍 ‘비버’에 맥주 한 잔 하러 갈 참이다. 누군가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문을 두드린다. 한 학생이 연구실을 빼꼼히 들여다본다.
학생: 제가 방해가 될까요?
교수: 전혀 아닐세. 지금은 내 면담 시간인걸. 들어와 앉게.
학생: 감사합니다.
교수: 보자…자네 좀 헤매고 있나보군?
학생: 아, 네.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제 조직사례연구에 적용하기가 어려워서요.
교수: 당연하지! ANT는 무엇에도 적용할 수 없거든.
학생: 그렇지만 저희는 배우길…제 말은…그게 요새 핫해 보이는데, 쓸모없다는 말씀인가요?
교수: 쓸모가 있을 수도 있지, 무언가에 ‘적용’하지 않는 한에서 말이야.
학생: 죄송한데요, 교수님께선 지금 무슨 선문답 놀이를 하시는 건가요? 저는 완전 조직 연구쪽 박사 과정생이란 말씀을 드려야할 것 같네요. 그러니까 제게 그런 기대 안 하시는 게...저는 프랑스적인 것들 별로 안 좋아하고요, <천 개의 고원> 정도 살짝 읽어봤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교수: 미안하네, 나는 있어보이는 무언가를 말하려던 건 아니네. 그저 ANT는 무엇보다 부정하는(negative) 주장이라는 거야. 어떠한 현상에 대해 아무런 실질적인(positive) 것도 말하지 않는다네.
학생: 그럼 무얼 할 수 있죠?
교수: 학생에게 해줄 최선의 말은 아마 이런 걸세. ‘연구참여자가 조직, 하드웨어, 심리학, 그리고 정치를 한 문장 안에서 뒤섞을 때, 섣불리 그것들을 작은 바구니에 깔끔하게 나눠 담지 말라. 통상적인 절차를 따랐다면 완전히 통약불가능하게 보였을 요소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추적하라.’ 그게 전부야. ANT는 무엇이 연결고리인지를 실질적으로 말할 수 없어.
학생: 연구대상(thing)[1]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데 어째서 ‘이론’이라 불리는 거죠?
교수: ANT는 이론이야. 내 생각엔 강력한 이론일세. 어떻게 대상을 연구할 것인가, 아니 오히려 어떻게 대상을 연구하지 않을 것인가, 또는 어떻게 행위자들에게 스스로를 표현할 공간을 갖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이론이지.
학생: 다른 사회이론은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교수: 어느 정도는 그렇네. 그 이론들의 강점 때문이지. 사회이론은 사회세계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지 본질적인 것에 대해 곧잘 말하잖나. 대개는 문제가 없어. 구성 요소가 알려져 있고, 레퍼토리가 간결한 한에서.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대상에는 통하지 않아. 조직학이나 정보학, 마케팅, 과학기술학, 경영학 같이 지독하게 경계가 모호한 분야에도 소용이 없지. 새로운 주제야말로 ANT를 필요로 하네.
학생: 그렇지만 제 행위자들은, 그러니까 제가 연구하는 회사 사람들은 많은 연결망을 만드는데요. 그들은 다른 많은 대상들과 연결돼 있고, 어디에나 있는데요...
교수: 아니 좀 보게. 그게 문제라니까! 그걸 말하기 위해서라면 ‘행위자-연결망’은 필요없어. 어떤 사회이론이든 그런 건 할 수 있지. 그저 연구참여자가 ‘연결망을 형성한다’고 보여주기 위해 이런 별난 주장을 택하는 건 시간 낭비야.
학생: 하지만 그런걸요! 그들은 연결망을 형성합니다. 보세요, 저는 그들과 연결된 것을 추적해왔습니다. 컴퓨터 칩, 기준, 스쿨링, 돈, 보상, 국가, 문화, 이사회 회의실, 모든 것을요. 제가 교수님 말씀처럼 연결망을 기술한 것 아닌가요?
교수: 꼭 그렇지는 않지. 나도 이게 매우 혼란스럽다는 데 동의하네. 그건 상당 부분 우리 잘못이고. 우리가 고안한 단어가 꽤 끔찍하잖나. 그렇지만 기술(description)에 따라 그려진 연결망과 기술에 사용되는 연결망을 혼동해서는 안 되네.
학생: 네?
교수: 학생도 연필로 그리는 것이 연필의 형태를 그리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에는 당연히 동의할 걸세. 이 애매모호한 ‘연결망’이라는 단어도 비슷하네. ‘행위자-연결망’으로 전혀 연결망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을 기술할 수도 있지. 개별적인 마음의 상태나, 기계부품, 허구적인 인물 같은 것이랄지. 반대로 ‘행위자-연결망’이 아닌 방식으로 연결망(지하철, 하수, 전화)을 기술할 수도 있지. 학생은 단순히 대상(object)과 방법을 혼동하는 거야. ANT는 방법이야. 그것도 상당히 부정적인(negative) 방법이지. ANT로 기술하는 것의 형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아.
학생: 혼란스럽네요! 헌데 제가 보는 회사 간부들이 뭔가를 보여주는, 정밀하고 강한 연결망을 만드는 게 아니라고요?
교수: 아마 그렇겠지. 내 말은, 분명 만들고 있겠지. 그런데 어쨌다는 건가?
학생: 그럼 그들을 행위자-연결망-이론으로 연구할 수 있겠네요!
교수: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네. 전적으로 자네가 행위자(정확히는 행위소)로 하여금 무엇을 하도록 허가하는지에 달렸네. 연결되거나, 상호연결되거나, 또는 이질적인 걸론 부족해. 여기서 저기로 흐르는 일종의 행위, 그러니까 ‘망’(net)과 ‘작동’(work)에 달렸어. ‘연결망’(network)이 아니라 ‘작동-망’(work-net)이라고 불러야겠지. 작업, 움직임, 흐름, 변화가 강조되어야 해. 그런데 지금은 모두들 ‘연결망’에 사로잡혀서 우리가 인터넷 비슷한 걸 말한다고 여기지.
학생: 행위자들이 연결망의 형태로 관련됨을 보여준다 해도 제가 ANT 연구를 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교수: 바로 그거야. ANT는 연필이나 붓을 가리키는 말이야. 그리거나 색칠할 어떤 모양이 아니라.
학생: 하지만 제가 ANT를 도구로 적용할 수 있냐고 여쭤봤을 때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교수: 왜냐면 도구가 아니니까. 달리 말하자면 ‘그저’ 적용될 뿐인 도구란 없기 때문이야. 도구는 언제나 자네가 지닌 목표를 수정한다네. 이게 ‘행위자’가 의미하는 바야. (우스꽝스러운 작명이란 데 동의하네만) 행위자 연결망은 다른 사회이론에선 얻지 못할 어떤 효과를 생산하게끔 해줘. 그게 내가 장담할 수 있는 전부야. 흔한 경험이지 않나? 연필로 그릴 때와 목탄으로 그릴 때의 느낌이 다르고, 타르트를 가스오븐에 굽는 것은 전기 오븐에 굽는 것과 같지 않지.
학생: 하지만 제 지도교수님은 그런 걸 바라지 않으세요. 그분은 제 자료를 집어넣을 틀을 원하시죠.
교수: 자료를 더 많이 저장하고 싶거든 더 용량이 큰 하드디스크를 사게.
학생: 지도교수님은 항상 “학생, 자네에겐 틀이 필요해”라고 말씀하세요.
교수: 자네 지도교수는 그림장사를 하나보구만! 틀은 보여주기엔 좋지. 도금된 것, 하얀 것, 무늬가 새겨진 것, 바로크 풍인 것, 알루미늄으로 된 것 등등. 그런데 액자를 고르는 걸로 작품을 시작하는 화가를 본 적 있나? 그건 좀 이상하지 않겠나?
학생: 말장난을 하시는군요. 제가 말하는 ‘틀’은 이론이나 주장, 요지, 개념 같이 자료에 의미를 부여하는 무엇입니다. 어쨌든 필요한 거잖아요.
교수: 아닐세! 말해보게. 만약 어떤 X가 단순히 Y의 한 ‘사례’라면 연구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 특수한 사례인 X인가 아니면 일반적인 Y인가?
학생: Y...겠지요? 그런데 X가 진짜 뭔가의 응용인지 보려면 X도...음, 둘 다인 것 같아요.
교수: 나는 Y라고 보네. X는 새로운 무언가를 가르쳐주지 않으니까. 무언가가 단순히 어떤 현상의 ‘실례’라면 그것 대신 현상을 연구해야지. 부가적으로 틀이 필요한 사례연구라는 건, 음, 처음부터 잘못 선택한 연구 아닐까!
학생: 그렇지만 대상을 맥락 속에 넣을 필요가 있지 않나요?
교수: 아닐세, 나는 여지껏 맥락이란 말이 이해가 안 됐네. 틀은 그림을 보기 좋게 만들고, 눈에 더 잘 들어오게 하고, 가치를 올려주거나, 날짜를 쓸 수야 있겠지만, 그림에는 무엇도 더해주지 않아. 틀이나 맥락은 자료에 정확히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 요소의 합이자, 자료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이야. 내가 자네라면 틀에 연연하지 않겠네. 단지 손에 닿는 현상을 기술하게.
학생: ‘단지 기술하라’는 건, 죄송하지만 너무 순진하지 않나요? 이건 우리가 피하라고 경고 받아온 경험주의나 실재론의 일종이지 않나요? 선생님 주장은, 음, 그것보단 세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요.
교수: 기술이 쉬울 것 같아서? 기술을 상투어 나열로 착각하는 게 틀림없구만. 비평하고 논쟁하는 책 백 권당, 기술하는 책은 겨우 한 권 나올까 말까야. 기술하기란, 구체적인 현상에 주목하기란, 주어진 상황에 고유하게 적절한 설명을 찾기란 내게도 늘 정말 어려운 일이야.
학생: 솔직히 헷갈립니다. 지금까지 저는 두 유형의 사회학, 즉 해석주의적 사회학과 객관주의적 사회학이 있다고 배워왔어요. 선생님은 당연히 객관주의 유형은 아니시지요?
교수: 물론 객관주의자일세. 전적으로 그렇네.
학생: 선생님이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상대주의자라고 들었는데요! 자연과학조차 객관적이지 않다는 선생님 말씀이 인용되어 왔잖아요. 관점과 입장의 다양성 등등의 면에서 당연히 해석주의적 사회학이시죠.
교수: 나는 해석주의적 사회학에 진심 동조하지 않네. 아닐세. 반대로 나는 과학(sciences)이 객관적(objective)이라고 굳게 믿네. 달리 무엇이겠는가? 과학이란 객체(objects)에 대한 것 아닌가? 내 말은 단순히 객체란 자네의 ‘객관주의자’가 바라는 것보다 좀 더 복잡하고, 주름지고, 복수적이고, 복합적이며, 얽혀있는 무엇으로 보인다는 걸세.
학생: 하지만 그게 정확히 ‘해석주의적’ 사회학이 주장하는 바 아닌가요?
교수: 오 전혀 아닐세. 그들은 인간적 욕망, 인간적 의미, 인간적 의도 따위가 유연하지 않은 객체의 세계, ‘순수한 인과관계’의 세계, ‘엄밀하게 물질적인 연결’의 세계에 ‘해석적 유연성’을 들여온다고 말할 거네. 그건 내가 말하려는 바가 전혀 아니야. 나는 여기 앉은 자네가 자네의 몸, 자네의 말, 자네의 걱정들로 이루어진 것과 정확히 마찬가지 의미로 여기 책상 위의 컴퓨터와 모니터, 키보드가 여러 층위로 이루어진 객체라고 말할 걸세. 다양성을 더하는 것은 객체나 사물, ‘회합’(gathering) 그 자체가 다양성을 더해줘. 자네가 아무리 조심스레 접근했다 해도 일단 해석학을 도마 위에 올린 이상 누군가는 꼭 이렇게 토를 달 거라고 보면 되네. “그래도 해석되지 ‘않은’, ‘자연적’, ‘객관적’ 사물 또한 물론 존재하지요.”
학생: 제가 말하려던 게 바로 그겁니다! 객관적 실재뿐만 아니라 주관적 실재도 있지요! 이게 두 사회이론 양쪽 다 필요한 이유이고요...
교수: 보게, “~뿐만 아니라 ~도”야말로 피할 수 없는 함정일세. 온갖 것으로 주장을 확장시키면 그 주장은 쓸모가 없게 돼. ‘해석’이 ‘객관성’의 유의어가 되어 버리니까. 반대로 실재의 한 가지 측면인 인간에 국한된 주장으론 꼼짝도 할 수 없어. 객관성은 항상 그 반대편에 있을테니까. 반대편이 더 풍부한지 빈약한지는 아무래도 좋아. 어느 쪽이든 손은 안 닿으니까.
학생: 하지만 선생님도 하나의 입장을 가지신다는 점, ANT 또한 어떤 위치에 자리한다는 점, 선생님 역시 또 다른 해석, 관점을 추가하셨다는 점을 부인하진 않으시겠죠?
교수: 그럼, 왜 내가 ‘부인’하겠나? 근데 그래서 뭐? 입장이란 그 위에 설 수 있고 수정할 수 있기에 멋진 거야. 왜 거기에 ‘꼼짝 없이 갇히겠나’? 천문학자들은 지구 위에 자신이 있는 곳에 따라 관점이 한정되지. 여기서 강 따라 내려가면 있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예로 들어볼까. 거기 가봤어? 아름다운 곳이지. 그런데 천문학자들은 도구, 망원경, 위성을 통해서 관점을 능수능란하게 바꿔왔어. 그들은 이제 전우주 은하계의 분포도를 그릴 수 있네. 멋지지 않나? 한 가지 입장을 보여주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수십 가지 방법을 보일 수 있어. 들어보게. ‘입장’과 ‘편향 없는 시각’(the view from nowhere)의 차이 같은 건 편하게 잊어도 돼. ‘해석주의적’과 ‘객관주의자’의 차이도 마찬가지야. 해석학일랑 내버려두고 객체, 아니 사물로 돌아가게.
학생: 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저의 위치 지어진 시점, 관점, 주관성에 한정되어 있잖아요.
교수: 당연하지! 그런데 무엇 때문에 ‘시점을 가진다’가 ‘한정’되거나 특히 ‘주관적’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해외여행 가서 ‘전망대 1.5km’, ‘파노라마’, ‘멋진 풍경’ 표지판을 따라가서 숨이 턱 막힐 듯 멋진 곳에 이르렀다고 해서, 그게 어떻게 ‘주관의 한계’를 보여주는 거겠나? 우리는 사물(계곡, 봉우리, 길)을 통해 이해하고, 통제하고, 해석하지. 2미터 아래에선 나무, 2미터 위에선 주차장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건 주관의 한계겠지. ‘주관성’은 여전히 한정적이고 우리는 정확히 똑같은 ‘관점’을 유지한 채 움직인 거야! 전망대에 올라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은 전망대가 입체적 공간이고, 우리가 돌아다니게끔 허락, 그래, 허락하기 때문이야. 무언가가 다양한 시점을 제공한다면, 바로 그 무언가가 매우 복합적이고, 복잡하게 포개져 있고, 잘 조직되어 있으며, 아름답기 때문, 맞아, 객관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야.
학생: 하지만 그 무엇도 객관적으로 아름답진 않아요.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거여야 하잖아요... 취향과 색깔은 상대적인...저 또 헷갈리는데요. 그럼 왜 학교에선 허구헌날 객관주의를 공격하는 데 시간을 쏟는 거죠? 선생님 말씀은 뭔가 맞지 않아요.
교수: 왜냐면 사람들이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대개는 사실관계(matters of facts)의 상투어기 때문이야. 컴퓨터, 소프트웨어, [컴퓨터의] 형식체계, [수학의] 정리, 회사, 시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주 제대로 된 기술은 없어. 자네가 공부하는 조직에 대해서도 거의 모르는 것과 다름 없지. 조직을 인간 감정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나? 그러니까 객관성 비판에는 두 가지 길이 있네. 하나는 객체로부터 멀어져 주관적인 인간의 시점으로 가는 길. 다른 하나는 내가 말하는 대로 객체로 돌아가는 길. 실증주의자는 객관성을 소유하지 않네. 앨런 튜링이 기술한 컴퓨터가 <와이어드Wired> 잡지의 기술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흥미롭지 않나? 어제 수업에서 봤듯 리처드 파워스가 <게인Gain>[2]에서 기술한 비누공장이 하버드 사례연구[3]에서 읽은 것보다 훨씬 생생한 것처럼 말이야. 경험주의로 되돌아가자는 게 이 게임의 요지일세.
학생: 그래도 전 여전히 제 견해에 한정되어 있잖아요.
교수: 당연하다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게 어때서? 자신의 관점에 ‘한정’된다는 온갖 헛소리들을 믿지 말게, 제발. 모든 과학은 하나의 입장에서 다음으로, 하나의 참조틀(frame of reference)에서 다음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발명해왔어. 바로 상대성이야.
학생: 앗! 본인이 상대주의자라고 고백하시는군요!
교수: 당연한 말이지만 달리 무엇일 수 있겠나? 과학자가 되어 객관성에 도달하길 원한다면 하나의 참조틀, 하나의 입장에서 그 다음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만 해. 그렇게 위치를 바꾸지(displacement) 않으면 자신의 좁은 관점에 한정되고 말지.
학생: 그러니까 객관성을 상대주의와 연결하시는군요?
교수: ‘상대성’, 그래 맞아. 모든 과학이 그렇게 하고, 우리 과학도 마찬가지야.
학생: 그러면 관점을 바꾸는 우리의 방법은 뭔가요?
교수: 말했다시피 우리는 기술하는 업계에 있어. 다른 모두들 상투어를 교환해. 조사, 서베이, 현장연구, 아카이브, 여론조사, 뭐든 간에 우리는 찾아가고, 듣고, 배우고, 실행하고, 능숙해지고, 견해를 바꾸지. 간단한 일이야. 이것이 연구야. 좋은 연구는 언제나 새로운 기술을 잔뜩 만드네.
학생: 하지만 기술은 이미 너무 많이 한 걸요! 빠져죽을 정도로요.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그게 바로 제가 헤매는 이유고 선생님을 찾아뵙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 이유예요. ANT가 저를 이 데이터 더미에서 구해줄 순 없나요? 전 틀이 필요해요!
교수: “내 왕국을 줄테니 틀을 다오!”[4] 아주 감동적이구만. 자네의 절망을 이해할 것 같네. 하지만 안 될 말이야, ANT는 거기에는 별 쓸모가 없어. ANT의 주요 신조는 행위자 스스로 자신의 틀, 자신의 이론, 자신의 맥락, 자신의 형이상학, 심지어 자신의 존재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만든다는 거지. 그러니 유감이지만 따라갈 쪽은 더 많은 기술이야.
학생: 그렇지만 기술은 너무 길어요. 그게 아니라 설명해야만 한다구요.
교수: 알겠나? 이래서 내가 사회과학 훈련 대부분에 동의가 안 된다니까.
학생: 축적한 자료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사회과학의 필요에 동의하지 않으신다구요? 그러면서 사회과학자면서 객관주의자라고 칭하시다뇨!
교수: 자네의 기술이 설명을 필요로 한다면 그건 좋은 기술이 아니라는 말이고, 그게 다야. 좋지 않은 기술만이 설명을 필요로 해. 꽤 단순하지. ‘사회적 설명’이란 대개 무슨 뜻인가? 이미 기술된 행위자에 또 다른 행위자를 추가해 행위에 필요한 에너지를 부여하는 일이지. 그런데 행위자를 추가해야 한다면, 그 연결망은 완전하지 않은 거야. 그리고 이미 결합된(assembled) 행위자에게 행위에 필요한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다면, 그들은 ‘행위자’가 아니라 단순한 중개자(intermediaries), 얼간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아. 아무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면 기술되어서는 안 돼. 지금껏 잘된 기술치고 설명을 필요로 하는 걸 본 적이 없어. 그렇지만 ‘설명’만 잔뜩 늘어놓고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 구린 기술은 수도 없이 읽어봤지. ANT로는 손 쓸 수 없어.
학생: 정말 괴롭네요. 다른 학생들이 긴 작대기 끝으로도 ANT 같은 건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을 때 알았어야 했는데. 선생님은 이제 뭘 설명하려는 시도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네요!
교수: 난 그런 말 안 했는데. 실제로 기술에 새로운 행위자를 추가할 수 있다면 자네의 설명이 적절하다는 말을 했을 뿐이야. 단지 연결망이 자네 생각보다 길다는 거지. 반대로 행위자가 아무런 변화도 만들지 않는다면 자네는 기술에도 설명에도 도움 안 되는 부적절한 무언가를 단지 추가하기만 하는 거야. 이 경우라면 설명을 갖다버리게.
학생: 하지만 제 동료들 모두 쓰는 걸요. ‘IBM 기업문화’, ‘영국 고립주의’, ‘시장압력’, ‘이해추구’를 말하죠. 왜 그런 맥락적 설명들을 포기해야 하죠?
교수: 맥락을 대강 휘갈겨 써놓거나 별로 안 중요한 그림의 일부분을 슬쩍 채워넣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맥락이 뭐라도 설명할 거라고 기대하진 말게. 맥락은 잘해야 모든 행위자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데, 행위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않으니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게 되지. 최악의 경우 맥락은 모든 흥미로운 새 행위자들을 케케묵은 옛 것들로 덮어버리지. 연결된 것들을 따라 내용물을 잘 배치하면 맥락은 그저 따라오기 마련이야. 렘 쿨하스(Rem Koolhaas) 말대로 ‘맥락은 구려.’ 계속하기엔 지쳐버렸거나 너무 게으를 때 기술을 그만 두는 방법에 지나지 않아.
학생: 하지만 그만 두는 게 바로 문제라니까요. 박사과정을 마쳐야 하는데 이제 8개월밖에 안 남았습니다. 선생님은 늘 ‘더 기술하라’고 하시는데 무슨 프로이트식 치료법 같아요. 분석에 끝이 없죠. 언제 그만 두나요? 제 행위자들은 도처에 있어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완결된 기술이란 무엇이죠?
교수: 이제야 좋은 질문, 그러니까 실용적인 질문을 하는군. 내가 늘 말했듯 좋은 학위논문은 다 쓴 학위논문이야. 그렇지만 단순히 ‘설명을 추가’하거나 ‘틀에 집어 넣는 것’ 말고도 그만 두는 방법은 있네.
학생: 말씀해주세요 그럼.
교수: 5만 자를 채웠거나, 나는 늘 잊어버리는 이곳의 논문양식을 갖추면 그만 두게.
학생: 와, 끝내주네요! 그러니까 제 논문은 다 썼을 때 마무리된다는 거죠. 정말 도움이 되네요. 진짜 너무 감사해요. 완전 한시름 놓이네요 이제.
교수: 좋아하니 다행이군! 아니 진지하게, 어떤 방법이건 텍스트의 정해진 분량과 유형을 따른다고 생각하지 않나?
학생: 하지만 그건 텍스트적 제한이지 방법과는 아무 상관 없잖아요.
교수: 이봐, 이러니까 또 내가 박사과정 학생들이 받는 훈련을 싫어한다니까. 텍스트 쓰기야말로 방법의 모든 것이야. 자네는 정말 여러 달에 걸쳐 정말 많은 인터뷰, 정말 오랜 시간의 관찰, 정말 많은 문서에 근거해 정말 많은 말들로 텍스트를 쓰지. 그게 다야. 자네가 하는 일은 그게 다일세.
학생: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하는데요. 배우고, 공부하고, 설명하고, 비평하고…
교수: 하지만 그런 거창한 목표들도 텍스트를 통해 성취하는 것 아닌가?
학생: 그렇죠. 하지만 텍스트는 도구고, 매체(medium)이고, 저를 표현하는 방법이잖아요.
교수: 도구, 매체 같은 건 어디에도 없네. 매개자(mediators)가 있을 뿐이야. 텍스트는 두껍다, ANT에 신조가 있다면 이것이지.
학생: 교수님 죄송하지만, 말씀드렸듯 전 프랑스적인 것에 영 관심이 없습니다. C언어에다 C++ 언어는 쓸 줄 알아도 데리다, 기호학 같은 건 안 해요. 세계가 말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도 안 믿고요.
교수: 비꼬려 들지 말게. 자네 안의 엔지니어적 성향과 어울리지 않는군. 나 또한 그런 걸 믿지는 않아. 자네는 그만두는 방법을 물었고 나는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말했어. 주어진 현상에 텍스트를 추가하라고. 자네 지도교수, 어쩌면 연구참여자 몇 사람, 동료 박사과정생 서너명이 읽을 거야. 여기엔 어떤 환상도 없네. 그저 평범한 현실주의지. 그만두는 해결책 하나는 ‘틀과 설명을 추가’하는 것. 다른 하나는 망할 학위논문 마지막 장에 마지막 글자를 써넣는 거야.
학생: 전 과학훈련을 받았어요! 저는 시스템 엔지니어고, 그걸 버리고 조직연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순서도, 제도, 사람, 신화학, 심리학을 기꺼이 추가할 수 있지요. 심지어 선생님이 가르치신 대로 다양한 요인을 ‘대칭적’으로 다룰 준비도 되어 있어요. 그렇지만 과학이 괜찮은 이야기를 말하는 거란 말씀은 마세요. 선생님을 따라가기 어려워요. 한편에선 완전히 객관주의자, 심지어 아마 순진한 실재론자가 되어 ‘단지 기술하라’고 하시고, 다른 쪽에선 완전히 상대주의자가 되어 ‘괜찮은 이야기 좀 해 봐’라고 하시잖아요. 진짜 끔찍할 만큼 프랑스적이지 않나요?
교수: 그래서 그게 자네에게 끔찍하게 어쨌다는 건가? 바보같이 굴지말게. 누가 ‘괜찮은 이야기’라고 했나? 난 아니야. 나는 자네가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고 했지. 아니라고 할 수 있나? 그리고서 오늘 나를 방문한 자네에게 남을 유일한 결과인, 너무 많은 단어로 쓰인 박사학위 논문이 두껍다고 했지.
학생: 의미가?
교수: 자네 논문이 정보를 창유리처럼 투명하게, 변형 없이 실어나르지 않는다는 의미야. “정보(in-formation)란 없고, 변형(trans-formation)뿐이다.”[5] 이 ANT 구호에는 동의할 것 같은데? 자, 그럼 이 말은 당연히 자네 박사학위 논문에 있어서도 참이지 않겠나?
학생: 어쩌면요. 그렇지만 쓰기가 어떤 의미에서 제가 더 과학적일 수 있도록 하는지, 그게 알고 싶어요. 과학의 에토스를 버리고 싶지 않다고요.
교수: 왜냐하면 텍스트는 그것이 쓰인 방법에 따라 자네가 연구하려는 행위자-연결망을 포착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야. 우리 학제에서 텍스트는 이야기가 아니고, 괜찮은 이야기도 아니야. 그보다 이야기는 기능적으로 실험실과 같아. 시도, 실험, 모의시험을 위한 장소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따라 행위자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고, 또는 추적할 연결망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어. 그리고 그건 전적으로 텍스트가 쓰인 방식에 달렸어. 새로운 주제는 모두 텍스트에 의해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해. 대부분의 텍스트는 그저 죽은 거나 다름 없어. 그 안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
학생: 하지만 저희 교과과정에선 누구도 ‘텍스트’를 언급하지 않는데요. 조직을 ‘연구한다’고 말하지 ‘쓴다’고는 안 한다구요.
교수: 내 말했지 않나. 자네는 잘못 훈련 받고 있어! 사회과학 박사과정생들에게 박사학위논문 쓰기를 안 가르치는 건 화학자에게 실험실 실험을 안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런 연유로 나는 요즘 다른 건 제쳐두고 글쓰기를 가르쳐. 같은 만트라만 줄곧 외고 있지. “기술하라, 쓰라, 기술하라, 쓰라.”
학생: 제 지도교수님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구요! 지도교수님은 제 사례연구가 ‘유용한 일반화로 이어지길’ 원하세요. ‘단순 기술’은 원하지 않으세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이 원하시는 대로 현상를 잘 기술했다고 치더라도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여전히 그걸 틀에 집어넣고, 유형화하고, 비교하고, 설명하고, 일반화해야겠죠. 그래서 어쩔 줄 모르는 겁니다.
교수: 자네 행위자들이 똑같이 지속적으로, 적극적으로, 성찰적으로, 강박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때나 어쩔 줄 몰라하게. 행위자들 또한 비교하고, 유형화하고, 기준을 설계하고, 그들의 기계, 조직, 이데올로기, 마음의 상태가 퍼져나가게 해. 어째서 그들은 멍청이처럼 굴고 자네 혼자 지적인 역할을 맡나? 행위자들이 확장하고, 연관짓고, 비교하고, 조직하기 위해 하는 일은 자네가 기술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네. 이 일은 ‘단순 기술’을 한층 덧씌우는 것과 달라. 기술에서 설명으로 넘어가려 하지 말고, 그저 기술을 계속 하게. 자네가 연구하는 회사에 대한 자네의 생각은 그 회사가 어떻게 해서 퍼져나갔는지에 비하면 흥미롭지 않아.
학생: 하지만 만약 제 사람들이 행위하지 않으면, 만약 적극적으로 비교하고, 표준화하고, 조직하고, 일반화하지 않으면, 저는 어떡하나요? 꼼짝 못하고 만다구요! 다른 어떤 설명도 더하지 못할 겁니다.
교수: 자넨 정녕 특별하구만! 행위자들이 행위하지 않으면 흔적이고 뭐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겠지. 그럼 아무 정보도 없는 거야.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거야.
학생: 그러니까 흔적이 없으면 전 입을 다물어야 한다구요?
교수: 놀랍구만! 자연과학 어디에서라도 이런 질문을 할 건가? 완전 멍청하게 들리겠지. 사회과학자는 정보가 부재한데도 설명을 이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구나! 자네 정녕 자료를 꾸며낼 요량인가?
학생: 아, 물론 아니죠. 그래도 역시...
교수: 좋네, 적어도 자네는 내 동료들 몇몇보다는 합리적이군. 아무 흔적이 남지 않는다, 고로 정보가 없다, 고로 기술이 없다, 따라서 할 말도 없다. 메워 넣지 말게. 그건 마치 16세기 한 나라의 지도 같은 거야. 아무도 간 적 없고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지. 그렇다면 제발 텅 빈 채로 내버려둬! 미지의 영역으로.
학생: 그럼 숨겨진 방식으로 행위하는 보이지 않는 실체들은요?
교수: 그들이 무언가 행위하면 흔적을 남겨. 그럼 자네는 정보를 얻을 거고, 그럼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입 다물어야지.
학생: 그렇지만 그들이 억압 당하고, 부정 당하고, 침묵 당한 상태면요?
교수: 존재한다는 증거 없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구상에 없어. 그 증거는 간접적이고, 믿기지 않고, 복잡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게 필요하지.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아. 그게 다야. 보이지 않는 것이 다른 사물을 움직이면, 학생은 그 움직임을 기록할 수 있고, 그럼 그건 눈에 보이게 되지.
학생: 증거요? 근데 증거가 뭐죠? 너무 실증주의적이지 않나요?
교수: 그랬으면 하네, 그렇지.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대상이 행위한다는 주장의 어디가 그렇게 대단한가? 자네가 사회이론과 음모론을 혼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염려되네. 하긴 요즘의 비판사회과학은 대개 음모론으로 이르긴 한다만.
학생: 그렇지만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으면 저는 그냥 행위자들의 말을 반복할 뿐인데요.
교수: 현상에 어떤 흔적도 차이도 만들지 않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더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학생: 그렇지만 저는 행위자로 하여금 그들이 몰랐던 무언가를 알도록 해야해요. 그게 아니면 왜 그들을 연구하겠어요?
교수: 사회과학자들이란! 항상 나를 당황하게 하지. 만약 행위자-연결망 이론(ANT)이 아니라 개미(ant)를 연구한다면, 개미가 자네 연구로부터 무언가 배우기를 기대할 건가? 당연히 아니지. 개미가 가르치면, 자네는 그들로부터 배우지. 자네나 곤충학자의 유익을 위해 개미가 무엇을 하는지 설명하지. 개미의 유익이 아니라. 개미들은 하나도 신경 안 써. 왜 연구가 연구대상인 사람들에게 늘 무언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학생: 그렇지만 그게 사회과학이 믿는 바 아닌가요? 그게 제가 이 학교에 있는 이유인데요. 경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정보기술의 온갖 신화를 폭로하고, 기술에 대한 광적인 흥분이라는 시장 이데올로기에 비판의 날을 세우기 위해서요. 아니라면 저는 쭉 실리콘 밸리에 남았을 거고, 돈도 훨씬 더 많이 벌었겠죠. 뭐 요즘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버블 붕괴 이후니까요… 아무튼 저는 사람들이 성찰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해요…
교수: …자네 연구에 등장하는 영광 이전에는 당연히 성찰적이지 않았던 사람들 말이지!
학생: 어떤 면에서는 성찰적이었겠죠.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왜 그런지 모르고 무언가 했어요…뭐가 문제죠?
교수: 문제는 너무 구리다는 거야. 사회과학에서 '성찰성'은 대개 전혀 관계 없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지는 한 가지 방법인데, 정작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에 분석가는 전혀 대답할 수 없다네! 성찰성은 자네가 런던정경대에 있다고 누리는 천부적인 권리가 아니야! 자네와 연구참여자의 관심은 다르고, 서로의 관심이 교차하는 건 기적이야. 그리고 모를까봐 하는 소린데 기적은 드물다네.
학생: 하지만 행위자들의 말에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으면 비판적일 수가 없는 걸요.
교수: 보게. 자네는 설명하는 과학자 노릇을 하고 싶다가도, 갑자기 또 폭로하고 비판하는 투사가 되고 싶어하는구만.
학생: 교수님은 대상(object)에 집중하는 순진한 실재론자였다가, 갑자기 또 그 유명한 교수님의 ‘행위자 자체’를 뒤따를 뿐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는 텍스트를 쓰라고 하시죠. 전혀 정치적이지 않아요. 비판적인 구석을 찾아볼 수도 없고요.
교수: 말해보시게, 폭로 전문가님. 자네는 어떻게 행위자들에게 ‘비판의 날’을 세울 건가? 정말이지 한 번 듣고 싶네.
학생: 틀이 있다면 할 수 있겠죠. 여기 와서 찾으려던 것 말입니다. 그렇지만 ANT에선 찾을 수 없다는 게 분명해 보이네요.
교수: 못찾겠다니 다행이야. 자네의 그 틀이란 연구참여자들에겐 보이지 않고 자네의 연구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겠지?
학생: 네, 물론이죠. 그것이 제 일의 가치를 더해줄 게 틀림없어요. 누구나 다 아는 기술이 아니라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설명, 맥락, 유형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어요. 아시다시피 생각할 시간이 없죠.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겁니다. 그런데 아직 말씀 안 드렸지만 회사에서 저한테 내부자료 접근권한을 주기로 했어요.
교수: 훌륭하네. 최소한 그들이 자네 일에 관심이 있으니 출발이 좋아. 그렇지만 6개월의 현장 연구에서 고작 몇백장 쓴다고 해서, 자네가 연구해온 엔지니어와 직원 340명보다 더 많은 지식을 혼자 생산할 수 있다고 보는 건 아니겠지?
학생: ‘더 많은’ 지식은 아니더라도 다른 지식이겠죠. 네, 저는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바로 그걸 위해 노력해야하지 않나요? 그게 제가 이 업계에 있는 이유 아닌가요?
교수: 자네가 어느 업계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생산하는 지식이 그들의 지식과 얼마나 다른지, 그들의 지식과 어떻게 다른지, 그건 중요한 질문이야.
학생: [제가 생산하는 지식은] 다른 모든 과학의 지식과 같은 류의 지식이자, 같은 방식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인데요. 손에 잡히는 사례에서부터 그 원인까지 보는 거요. 그리고 일단 무엇이 원인인지 안다면 결과를 도출할 수 있지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건 마치 평형 상태에서 벗어난 진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묻는 거잖아요. 제가 갈릴레오 법칙을 알면, 저는 더이상 어떤 특정한 진자를 들여다볼 필요가 없게 되죠.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아니까요. 물론, 외부 작용(perturbation)[6]이 없다고 가정한다면요.
교수: 물론이라니! 그렇다면 자네는 갈릴레오의 법칙이 -외부 작용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진자의 낙하를 설명한 것처럼, 틀로 사례를 설명하기를 바라는 건가?
학생: 네, 그런 것 같네요. 덜 과학적이긴 하지만요. 왜 그러시죠? 문제가 있나요?
교수: 없네. 그렇다면 훌륭하겠지. 다만 타당한가? 의미인즉 구체적으로 주어진 진자가 무얼 하든지 낙하하는 물체에 대한 법칙에는 아무런 새로운 정보도 더하지 못한다는 거야. 낙하법칙은 진자의 상태에 대해 모든 것을 잠재적으로 파악해. 철학자처럼 말하자면 구체적인 사례란 단순히 이미 거기 있는 ‘잠재성의 실현’인 거지.
학생: 그게 이상적인 설명 아닌가요?
교수: 그건 그냥 문제지. 그건 이상 곱하기 이상, 이상적인 설명의 이상이지. 나는 자네 회사의 자회사도 과연 그렇게 행동할까 좀 의심스럽네. 그리고 자회사의 행동을 법칙으로 만들 수 없을 거라고 꽤 확신한다네. 모든 것을 이미 거기 잠재적으로 있는 무엇의 구체적인 실현이라고 연역하는 법칙으로 말이야.
학생: 외부 작용이 없다고 가정하고요…
교수: 그래, 그래, 그래. 그건 당연히 깔고 가는 거고. 놀라울 만큼 겸손한 학생이구만.
학생: 지금 저 놀리시나요? 그런 틀이라면 찾으려는 노력은 가능해 보이는데요.
교수: 가능하다고 친들, 그게 바람직할까? 잘 보게나. 학생 말은 결국 자네가 기술한 행위자들이 뭘 하든지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않는다는 거야. 소소한 예외를 제하면, 행위자들은 그저 잠재력을 실현시킬 뿐이야. 즉 행위자가 전혀 아니라는 의미야. 단지 그들을 통과하는 힘을 전달하는 거지. 그러니 학생, 자네는 수동적인 중개자일 뿐인 사람, 대상, 장소를 기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걸세. 그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지. 자네의 현장 연구는 그냥 낭비야. 자네는 원인으로 바로 향했어야했네.
학생: 그렇지만 그게 과학의 존재이유인데요! 바로 숨은 구조를 발견하는 거요. 구조는 뭔가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자가 실은 다른 것의 자리를 채울 뿐인 플레이스 홀더(placeholder)[7]라는 것을 설명하죠.
교수: 그러니까 자네 구조주의자구만! 드디어 정체를 드러냈어. 플레이스 홀더를 자네는 행위자라고 부르나? 그러면서 동시에 행위자-연결망 이론이 하고 싶다고! 절충주의의 한계를 꽤 멀리까지 늘리는데!
학생: 왜 둘 다 할 순 없죠? ANT에 과학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건 구조주의적인 게 틀림없잖아요.
교수: 행위자-연결망에 ‘행위자’란 단어가 있는 건 눈치챘나? 구조주의적 설명에서 플레이스 홀더가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겠나?
학생: 쉽죠. 그건 기능을 수행해요. 제가 잘 이해했다면 이게 구조주의의 훌륭한 지점이죠. 같은 위치에 있는 어떤 다른 행위자도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어요.
교수: 그러니까 플레이스 홀더는 다른 것에 의해 완전히 대체가능하다는 건가, 정의상으로는?
학생: 네,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교수: 하지만 그건 정말 미심쩍은 것이고 ANT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네. 내 말대로 풀자면 어떤 차이도 만들지 않는 행위자는 전혀 행위자가 아니야. 행위자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대체될 수 없다는 거야. 행위자는 유일한 사건이고, 다른 것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네. 어떤 표준화 과정을 거쳐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 한 말이지. 물론 그 경우에도 제3의 행위자, 제3의 사건이 필요하네.
학생: ANT는 과학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교수: 구조주의적 과학은 확실히 아니지.
학생: 그게 그거죠, 모든 과학은…
교수: 아니지! 조직학, 과학기술학, 경영학, 정보학, 사회학, 지리학, 인류학, 그것이 어떤 필드든 정의상 구조주의적 설명에 의탁할 수 없어. 정보는 변형이기 때문이지.
학생: ‘변형의 체계’, 그게 바로 구조주의잖아요!
교수: 전혀 아니지. 여보게. 구조주의에서는 어떤 것도 진정 변형되지 않고 단지 결합돼 있지. 자네는 구조주의와 ANT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가늠 못 하는군. 구조는 하나의 연결망인데, 우리가 매우 피상적인 정보만 갖고 있는 연결망이야. 시간에 쫓길 때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그게 더 과학적이라고 하진 말게. 내 서술에 행위자가 들어가려면 행위자는 플레이스 홀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행해야하지. 그들이 무언가 행한다면, 그건 차이를 만들어야하고.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면 그들을 빼고 다시 기술하게. 자네는 대상이 없는 데서 과학을 바라고 있는 거야.
학생: 교수님과 교수님의 이야기, 사건이 가득한 이야기들을 교수님이 바라고 계신 거잖아요! 저는 설명, 지식, 날카로운 비판에 대해 말하는 거지 TV 시트콤 대본이나 쓰려는 게 아니라고요!
교수: 마저 들어보게나. 자네의 몇 백 페이지 글뭉치가 차이를 만들길 바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자네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기술해 사람들에게 돌려주면 그들의 행동방식에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겠군. 이것이 자네가 말한 ‘비판의 날'인가?
학생: 그런 것 같네요.
교수: 그렇지만 학생은 동의하지 않나. 너무 일반적이라서 그들 행동에 아무 차이도 없는 원인들에 대해 호소해봤자 소용 없다는 걸 말이야.
학생: 당연히 소용 없죠. 저는 진짜 인과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요.
교수: 인과성이라고 별 소용이 있을까. 진짜 그런 게 있는지부터 의심스럽다만, 인과성이란 고작 연구참여자를 자네라면 기능, 구조, 문법이라 부를 다른 행위자의 플레이스 홀더로 만드는 효과밖에 없겠지. 사실상 그들은 더 이상 행위자가 아니라 얼간이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아. 이 말조차 꼭두각시에겐 불공평하겠지만 말야. 암튼, 자네는 행위자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거야. 작은 흔들림만 더하는 어떤 진자처럼 그들은 잘해봤자 작은 외부 작용이나 더하는 거지.
학생: 네?
교수: 이제 자네가 연구한 사람들을 ‘행위하지 않는’ 불우한 플레이스 홀더로 변형시키는 게 뭐가 그렇게 정치적으로 대단한 일인지 말할 차례야. 오직 자네만이 보고 감지할 수 있는 숨겨진 기능들을 위해서 말이야.
학생: 음, 교수님은 문제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으시네요.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행위자들이 무엇이 자기에게 강요되는지 알면, 그들이 더 의식적이고 성찰적이 되면, 그들의 의식이 좀 고양되지 않는 건가요? 그들은 그제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맡게 되죠. 그들은 더 계몽된다고요, 아닌가요? 만약 맞다면, 전 이제, 상당 부분 제 덕에, 그들이 더 능동적이고 더 완전한 행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수: 훌륭해, 아주 훌륭해! 그러니까 자네에게 행위자(actor)는 모두 결정된 대리자(agent)라는 거지? 거기에다 어떤 역할을 위한 플레이스 홀더도 하고, 외부작용도 좀 있고, 계몽된 사회과학자가 주는 의식도 가진다는 거지? 끔찍해, 그냥 끔찍해. 게다가 자네는 ANT를 이 사람들에게 적용하려 하고! 자네는 그들을 행위자에서 플레이스 홀더로 환원한 뒤에, [환원으로 생긴] 흠을 비난하고, 그들이 이전에도 가지고 있었지만 자네가 그들을 구조주의적 방식으로 대하면서 빼앗아간 성찰성을 그 불쌍한 놈들에게 다시 부여하길 원하지. 대단해! 그들은 자네의 ‘설명’을 가지고 오기 전부터 행위자였네. 그들을 그렇게 [행위자로] 만들어내는 것이 자네 연구라고 하지 말게. 아주 대단한 일을 했네, 학생! 부르디외도 그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을 걸세.
학생: 교수님이 부르디외를 별로 안 좋아하실 수는 있는데요, 적어도 그는 진짜 과학자였어요. 그리고 그보다 더 훌륭한 건 그의 정치적 연관성이죠. 제가 볼 때 ANT는 둘 중 아무것도 아닌데요.
교수: 고맙네. 지난 30년 동안 과학과 정치의 관계를 연구해온 사람으로서 어떤 과학의 정치적 연관에 대한 이야기에 쉬이 겁을 먹진 않네만.
학생: 권위 있는 주장들에 겁먹지 말라고 배워왔어요. 그러니 교수님의 30년 연구는 제게 영향을 끼치지 못해요.
교수: 인정. 그렇지만 자네는 ‘ ANT로 무엇을 할 수 있나’ 물었고, 나는 ‘구조주의적 설명은 못한다’고 대답했어. 양자는 전혀 양립할 수 없어. 한편에서 잠재력(potentialities)을 실현하는 행위자, 고로 전혀 행위자가 아닌 행위자가 있다면, 다른 한쪽에선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잠재성(virtualities)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행위자를 기술하는 거야. 아주 구체적인 텍스트가 필요해. 자네가 연구 대상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아주 구체적인 작업 프로토콜을 요구하지. 이게 아마 자네가 ‘비판적인 날카로움’과 ‘정치적 연관성’이라고 부르는 것이겠지.
학생: 저희 둘이 그렇게 다른가요? 교수님도 비판적인 날카로움을 원하시잖아요.
교수: 그런가,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하네. 비판은 자동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경우 실패해. 인터뷰 200장, 관찰, 뭐가 됐건 결과는 마찬가지야. 정치적 연관을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들이 또 필요하네. 그건 드문 일이지. 엄청난 창의적인 프로토콜이 필요해. 갈릴레오가 진자에 대해서, 또는 파스퇴르가 광견병 바이러스에 대해서 필요로 했던 기적적인 무언가 말이야.
학생: 그럼 전 뭘하죠? 기적을 위해 기도라도 할까요? 닭이라도 잡을까요?
교수: 그런데 왜 자네의 작은 글이 커다란 자연과학 실험실보다 누군가에게 자동적으로 더 연관되길 바라나? 인텔 반도체가 핸드폰과 연관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이 필요했는지 생각해보게! 게다가 자네는 아무 대가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런던정경대학 라벨을 붙이기를 [런던정경대학 스타일의 설명을 적용하길] 원하나? 연관되기 위해서는 추가 작업이 필요해.
학생: 바로 제가 원하는 겁니다! 더 많은 작업에의 전망요!
교수: 근데 그게 요점이야. 주장이 자동적으로 만들어지고, 모든 것을 포괄하고, 만능이라면 그건 과학적일 수가 없어. 그건 그냥 연관이 없는 거지. 연구가 정말 과학적이라면, 그건 실패할 수도 있었겠지.
학생: 참 위안이 되네요. 제 논문이 통과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일깨워주시니 친절도 하시구요!
교수: 자네는 과학을 기술의 연마와 혼동하고 있네. ‘현상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은 과학 실천의 본질이다.’[8] 자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부르디외의 비판 사회학이 적용되지 않을 주제를 하나라도 떠올릴 수가 있나?
학생: 아니 저는 ANT를 적용할 주제를 하나라도 떠올릴 수가 없는데요!
교수: 훌륭해, 맞는 말이야. 내 생각도 정확히 그래.
학생: 칭찬으로 들으시라고 한 말이 아닌데요.
교수: 그렇지만 난 진짜 칭찬으로 받아들이네! 무언가를 적용하는 건 좋은 사회과학 텍스트마냥 아주 희귀하지.
학생: 교수님께서 대단히 섬세한 과학 철학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정중히 한 말씀 드리면, 아직 어떻게 좋은 텍스트를 쓸 수 있는지 안 말해주셨어요.
교수: 자네는 틀, 문맥, 구조를 ‘단순 기술’에 무척이나 더하고 싶어했네, 내 말이 들어왔겠나?
학생: 그러면 좋은 ANT 텍스트와 나쁜 텍스트에는 어떤 차이가 있죠?
교수: 이제 좋은 질문이 나오네! 답은 좋은 실험실과 나쁜 실험실의 차이와 같다는 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학생: 아, 네. 음, 감사합니다. 말씀 나눠서 정말 좋았어요. 근데 어쨌든 저는 ANT 말고 루만의 체계이론을 기본 틀(underlying frameworks)로 삼을까 생각 중이었어요. 그게 좀 가능성이 많아보여요. ‘자기생산(autopoiesis)’이랑 그런 것들이요. 아니면 둘다 조금씩 이용할지도 모르고요.
교수: 음....
학생: 루만 안 좋아하세요?
교수: 나라면 ‘기본 틀(underlying frameworks)’은 모두 빼겠네.
학생: 그렇지만 제가 볼 때 교수님이 말하시는 ‘과학’은 사회과학 훈련의 모든 법칙들을 무너뜨리는데요.
교수: 난 그것들을 무너뜨리고 내 행위자들을 좇는 것을 선호하네. 자네가 말했듯 나는 결국 순진한 실재론자(realist)고 실증주의자니까.
학생: 뭐가 좋을지 아세요? 아무도 ANT가 뭔지 이해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까, 교수님이 입문서를 쓰세요. 그러면 선생님들이 그게 뭔지 알 거고, 버릇없게 굴려는 것은 아닌데, 그러면 선생님들이 저희에게 그걸 그렇게 하라고 종용하지 않으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교수: 그 이론이 그렇게 나쁜가?
학생: 저는 그저 박사과정 학생이고, 교수님은 교수님이시잖아요. 연구도 많이 내셨고요. 교수님은 제가 할 수 없는 작업들을 하실 수 있잖아요. 저는 제 지도교수 말을 들어야되거든요. 교수님 조언을 마냥 따를 순 없어요.
교수: 그럼 왜 나한테 왔나? 왜 ANT를 쓰려고 하지?
학생: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지난 30분간 저도 같은 생각 중이었어요…
* (원주) 이 대화(록)의 다른 판본이 다음에 수록되었다. Bruno Latour, 2004, "On Using ANT for Studying Information Systems: A (Somewhat) Socratic Dialogue," The Social Study o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 edited by C. Avgerou, C. Ciborra, and F.F. Land, Oxford University Press, pp. 62–76.
[1] thing은 "사물", object은 "객체"로 번역하되, thing이 보다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대상"으로 번역하였다.
[2] 1998년에 출간된 리처드 파워스의 소설.
[3] 하버드 경영대학원(HBS)에서는 기업의 사례연구 수업을 진행하고 결과물을 출판한다.
[4]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에 나오는 대사 "My kingdom for a horse!"의 패러디.
[5] 참고: Lovink, G. and Schultz, P., 1997, "There is no information, only transformation: An Interview with Bruno Latour" (https://www.nettime.org/Lists-Archives/nettime-l-9709/msg00006.html)
[6] 고전/양자역학에서 운동을 설명하는 함수에 운동에 흩어짐을 만드는 부가항이 있는 경우, 이를 섭동(perturbation)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법칙을 따르는 진자의 운동에 가해지는 추가적인 외부 작용을 뜻하며, 이하 '외부 작용'으로 번역하였다.
[7] 플레이스 홀더는 언어학에서 앞뒤의 문맥으로 어떤 구문이 나올지 예측될 때, 형식적으로 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용되는 기호로, 다른 요소들로부터 자신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정연주, 2017, 구문의 자리채우미 '하다' 연구, 태학사). 영어 Placeholder는 한국어로 자리채우미, 자리지키미, 자리표시자 등으로 번역된다. 이 번역에서는 원어를 살려 '플레이스 홀더'로 번역하였다.
[8] (원주) 참고: Garfinkel, Ethnomethodology’s Program, p. 264.
원문
Bruno Latour, 2005, "On the Difficulty of Being an ANT: An Interlude in the Form of a Dialog," Reassembling the Social: An Introduction to Actor-Network-Theory, Oxford, UK: Oxford University Press, pp.141-156.
번역
김유하 /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laicoseht@gmail.com
박주현 / UC 버클리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jp53@berkeley.edu